어제 채근담을 읽으면서 블로그 글을 쓰면서 많은 생각과 고민이 들었습니다. 내가 지금 당면한 삶을 충실히 사는 것도 버겁고 힘든 일인데, 전세계 인류에서 극소수에 불과한 위대한 이들의 발자취를 따라 나 또한 영원히 기억되는 무언가가 되기 위해 기약없는 노력을 하는게 그 성패를 떠나 정말 옳은 일인가에 대한 고민 말입니다.
확실한 결론을 내리는 데에는 한참 미치지 못했지만, 문득 이제는 고인이 된 투자자 찰리 멍거가 언급했던 사례를 돌이켜보면 확실히 내가 지금의 삶만을 생각하며 죽음 이후에 무관심해서는 안된다는 것 만큼은 분명 동의할 수 밖에 없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제가 읽게 된 찰리 멍거의 언급은 아래와 같습니다.
살다보면 때로는 악랄한 악한을 만나게 됩니다. 그들은 부와 유명세를 얻은 채 죽죠. 하지만 대게 사회로부터 멸시당합니다. 그들의 장례식이 열리는 성당에 사람들이 가득하다면, 그 중 대부분은 축하하려고 거기 있는겁니다.
그런 사람이 죽었던 때가 생각나네요. 목사가 “둘아가신 분을 기리는 말씀을 들을 시간입니다”라고 말했지만, 누구도 앞으로 나서지 않았습니다.
어색한 정적이 흐르다가 마침내 한 명이 나서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이 사람의 형은 더 나쁜 사람이었어요.” 그런 꼴이 되어서는 안됩니다. 그런 장례식으로 끝나는 삶을 살아서는 안됩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죽은 뒤에도 내가 무언가를 남기고 싶은 본능의 호소에 휘둘려 헛된 몸부림을 치며 살 수도, 그런 본능에 연연하지 않고 우리에게 주어진 현생에만 최선을 다하다 마침내 허무함 속에 몸부림치며 죽어갈 수도 있고 누군가는 둘 모두가 실패한 인생이라고 폄하하고 손가락질 할 수 있을겁니다. 하지만, 누구도 부정할 수 없이 분명한 사실은, 둘 중 그 어느쪽 인생이라 하더라도 하다못해 위와 같은 삶을 살다 가는 것보다는 훠얼씬 더 가치있고 덜 안타까운 인생이라 가슴을 펴고 말할 수 있다는 겁니다.
무언가 거창한 이상과 영원, 우리가 전혀 인식할 수 없는 우리의 죽음 이후에 대한 것을 논하고 고민하는 것보다 일단 누구라도 최악이라 수긍할 수 밖에 없는 한심하고 안타까운 장례식을 맞이하지 않기 위해 항상 경계하고 삼가하는 것 부터 실천하는 것이 우리가 인간이라는 실존의 존재증명을 위해 걸어야 하는 여정의 첫 걸음이자 시도가 되어야 하지 않겠는가 합니다.
그러한 실천의 시급함이야말로 우리가 끊임없이 성찰하고, 겸손하며, 배워가야 하는 절실한 이유이자 근거라고 생각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