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은 물결이 일어나지 않으면 본디 잔잔하고
거울은 먼지가 끼지 않으면 본디 깨끗하다.
그렇듯이 마음을 굳이 맑게 하지 않아도 좋으니 흐리게 하는 것을 없애면 맑음이 절로 나타난다.
즐거움을 굳이 찾지 않아도 좋으니 괴롭게 하는 것을 없애면 즐거움이 절로 살아난다.
채근담 151편
채근담에서는 위와 같이 사람의 마음이 본디 맑고 깨끗하며 즐겁다고 주장합니다. 그런데, 여기서 사람의 마음이 “본디” 맑고 깨끗하다는 말을 “태어나면서부터” 맑고 깨끗하다는 말로 착각하거나, 그렇게 은근슬쩍 바꿔서 쓰면 진정한 뜻을 왜곡하게 될 수도 있습니다. 사람의 마음은 태어나면서부터 순수하거나 맑거나 깨끗하지 않습니다. 막 태어난 아이의 마음에 가득한 원초적 욕망에는 선악의 개념이 없고, 쾌락을 좇는 본능의 명령이 프로그램되어 있을 뿐입니다.
성선설은 맹자가 매우 악의적이고 정치적인 “혁명론”을 설파하기 위해 동원한 프로파간다의 일종이지 실상과는 거리가 먼 이야기입니다. “사람이라면 응당 측은지심을 비롯한 선한 마음이 있어야 하는데, 백성이 죽어나가도 눈 하나 깜짝하지 않는 저 군왕과 귀족들을 보라, 저들은 사람이 아니니 죽여도 살인이 아니요, 해충을 구제하는 것과 다를 게 없다”는 프로파간다를 정당화하기 위해 사람이라면 응당 착한 마음을 가지고 태어났다는 전제를 깐 것을 가지고 진지하게 성선설의 진실성을 받아들일 이유는 없지요.
사람의 본성은 악하고 게으릅니다. 그러한 본성을 인간의 “본디 마음”이라고 말하면 안됩니다. 갓 태어난 아기의 순수한 쾌락지향과 이기심으로 형성되있는 악한 본성만으로는 사람들이 모여서 사회를 이루어 원만히 살아갈 수 없기 때문에 커가며 교육과 훈육을 통해 그 마음은 점점 성숙하며 선하게 바뀝니다.
이렇게 수많은 이들과 함께 부대끼며 모난 곳을 깍아 둥글게 완성된 조약돌과 같은 마음이 진정한 우리의 “본디 마음”입니다. 진실로, 그것이 우리의 “본디” 마음이며 이렇게 한 번 성숙한 마음은 굳이 말초적인 자극이나 스트레스, 마음을 좀먹는 악한 영향력이 간섭하지 않는 한 그 자체로 안정적이며 즐겁고 행복한 상태를 유지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태어나기 전부터 결정된 유전적 본능보다 우리가 사회 속엔서 살면서 배우고 익혀온 모든 학습과 경험이 훨씬 더 강력하고 위대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진정 “선한 것”이 있다면 우리의 본성이 아니라 우리가 살면서 배우고 익혀온 모든 교훈과 가르침 안에서 그것을 찾아야 하며, 지금 내 마음보다 훨씬 더 깨끗하고 맑으며 즐거움이 절로 살아나는 더 빛나는 마음을 향해 정진할 것을 다짐해야 할 것입니다. 우리가 품고 있는 본디 마음은 우리의 과거가 아니라 미래에 존재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가슴 속에 품고 있는 “본디 마음”은 언젠가는 지금보다 훨씬 더 아름답고 빛나고 있을 것임을 믿어 의심치 말아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