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의 본체는 하늘의 본체와 같다.
그러니 마음이 한번 기뻐하면 빛나는 별에 상서로운 구름이 뜨고
마음이 한번 분노하면 천둥 벼락에 폭우가 쏟아지고
마음이 한번 인자해지면 따사로운 바람에 단 이슬이 내리고
마음이 한번 혹독해지면 뜨거운 햇살에 가을의 찬 서리가 뿌린다.
무엇이 드물게 일어나랴.
다만 감정이 일어났다가도 바로 또 사라져서
마음속이 막힌 데가 없이 비어있다면
곧 큰 우주와 하나가 되리라.
채근담 172편
마음의 본체가 막힌 데 없이 비어있다면 큰 우주와 하나가 될것이라는 말은 무슨 뜻인지 누구라도 쉽게 이해가 가지 않을겁니다. 저도 그렇구요. 이 구절의 마지막 부분의 한자 원문은 便與太虛同體(변여태허동체)입니다. 여기서 중요한 개념이 태허(太虛)라는 개념입니다.
태허라는 단어는 장자에 나오며 장자편에서는 세상 만물을 모두 아우르는 공간적 개념으로 쓰이지만, 훗날 북송시대 성리학자인 장재가 형이상학적인 개념으로 설파함으로서 우주만물의 근원으로서 하나의 기운(氣)을 가르킨 말입니다. 태허는 텅 빈 것이 아니라 기운으로 충만한 터전이며, 만물의 생성과 소멸을 기운의 모임과 흩어짐으로 설명합니다. 이것이 장재가 말한 기일원론(氣一元論)입니다.
장재는 직접적으로 감지할 수 없는 지극히 맑고 엷은 기가 태허에 가득 차 있으면서도 만물의 변화에 따라 잠시 기의 모습을 볼 수 있을 뿐 허와 기는 동일적인 것이기에 기는 보이거나 보이지 않는 유와 무가 뒤섞인 것으로 간주합니다. 이렇게 유상도, 무상도 아닌 유상무상이 섞여있으며 변화에 이르러 간혹 보이거나 그렇지 않은 기운을 가지고 우주만물을 설명하려는 시도는 유학자로서 도교와 불교를 비판하기 위해 나온 논리입니다.
기로 규정된 모든 것들은 그 형태가 일시적이기 때문에 도교에서 말하는 장생불사는 환상에 불과하며, 또 기의 형태는 비록 일시적이지만 실제로서는 영원히 소멸하지 않는 것이기 때문에 불교에서 말하는 허와 공이라는 말은 그저 허망한 것에 불과하다고 본 것입니다.
이렇게 이(理)가 아닌 기(氣) 만으로 우주만물을 설명하는 장재의 기일원론은 불교와 도교에 대응해 성리학의 기초를 닦고 기본의 토대가 되는 큰 업적을 이뤘지만 훗날 주희(주자)와 정이에 의해 배격됩니다.
중국에서는 이러한 비판에도 불구하고 장재의 기일원론 또한 중요하게 다루어지다 결국 명나라 학자 홍자성에 의해 채근담에서도 중요하게 언급하고 있는 사상으로 이어지지만, 조선에서는 주희의 해석만을 교조주의적으로 섬기다 결국 만물의 현상과 변화를 관찰하고 이치를 깨닫고자 하는 과학적 접근법이 거세되고, 신분질서의 정당성과 지배구조의 완성에 유용한 품성론에 특화된 이(理)에 메몰되어 주리론이니 주기론이니 하는 품성론에 대한 서로의 이견을 가지고 다투다 결국 고루하고 허황된 학문으로 굳어져 조선의 퇴보와 정체를 부추겼던 것을 떠올려 본다면, 어떤 것이든 초심을 잊지 않고 언제든 잘못된 길을 걸어가고 있는지 항상 돌아보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 일인지를 새삼 되새기게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