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라리 소인배가 꺼리고 헐뜯는 사람이 될지언정
소인배가 아첨하고 좋아하는 사람은 되지 말라.
차라리 군자가 통렬하게 꾸짖는 사람이 될지언정
군자가 감싸고 용서하는 사람은 되지 말라.
채근담 190편
소인배가 아첨하고 좋아하는 사람은 힘있고 돈있는 소인배이지 군자가 아닙니다. 소인배는 인간과계에서 즐거움과 이익을 기대할 뿐이기에 군자를 따르고 아첨하는 법은 없기 때문입니다.
반면 군자는 소인배들을 꾸짖지 않습니다. 소인배들이 모이는 곳에서 벗어나 다툼과 번잡함을 피할 뿐, 그들과 상종하려 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군자가 누군가를 꾸짖는 건, 그 사람이 꾸짖음을 듣고 반성하고 한걸음 더 나아갈 줄 아는 사람이라 믿고 기대하기 때문입니다. 군자의 꾸짖음은 항상 그 사람의 성장을 향해 초점이 맞춰져 있습니다. 소인배가 누군가를 꾸짖는 것은 그 꾸짖는 사람이 잘되라고 꾸짖는게 아니라(말로는 항상 너 잘되라고 이러는거라고 추임새를 넣습니다만,,,) 자기 자신이 편하고 이익을 얻기 위해서입니다.
군자가 감싸고 용서하는 사람, 더이상 꾸짖지 않는 사람은 더는 기대할 게 없는 사람입니다.
이러한 이치를 생각해볼 때 요즘 세상에는 어디를 봐도 군자를 잦아보기가 어렵다는 걸 새삼 느낍니다. 정확히는 세상이 군자를 필요로 하지 않는 것 같습니다. 누군가가 나의 결점을 준엄하게 꾸짖는다면 설령 그가 나의 부모님이라 할지라도 과연 온당항한 것인지 고민하는게 세상 풍조입니다. 나 자신는 마땅히 존중받아야 하며, 스스로 모든 걸 결정할 수 있고, 또 마땅히 책임져야 하는 개인주의가 세상의 작동원리처럼 보편화되었기 때문이겠죠.
따지고 보면, 개인주의라는 가치관은 철인이나 군자같은 게 없이 마땅히 소인배들만으로도 사회가 발전할 수 있다는 자신감에서 출발하는 가치관입니다. 그렇기에 개인주의는 필연적으로 민주주의와 깊게 연결되는게 당연한 이치입니다. 현대 우리 사회는 군자를 필요로 하지 않는 소인배들이 시민이자 주역을 자임하는 사회가 된 것입니다.
그런 작금의 사회상이 잘못 되었다거나, 과거로 돌아가야 한다는 생각은 부질없고 어리석은 생각이라고 생각합니다. 사회는 항상 상황에 맞게 변화하고 진화해 왔으며, 그러한 변화를 부정하는 것은 퇴행이자 반동일테니까요. 다만, 저는 저 자신이 참으로 모자란 사람이라는 걸 잘 알기에 누군가 준엄하게 나의 결점을 꾸짖고 억지로라도 그것을 고쳐 더 나은 사람이 되도록 채근해주면 얼마나 고마울까 하는 생각을 자주 합니다.
하지만, 그런 군자의 꾸짖음을 사회생활을 통해 접할 수 없으니 아쉬우나마 좋은 책을 곁에 두고 열심히 읽는 것이 차선책이 될 수 있겠지요. 남은 생이 얼마나 남아있을지는 알 수 없으나, 부디 그 동안 건강이 허락하여 남아있는 여생의 대부분을 열심히 책을 읽으며 나를 비춰 고치고 배울만한 가르침이 끊이지 않았으면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