논어(論語)의 종류

공자와 제자들의 주장과 일화가 담긴 대표적인 유교경전이 바로 논어입니다. 그런데, 이 논어가 공자 때부터 기록으로 이어져 별다른 수정 없이 하나의 판본으로 이어진 것이 아니라고 하네요.

당장 한나라 때만 해도 제논어(齊論語), 노논어(魯論語), 고논어(古論語) 이렇게 세가지 판본이 존재했다고 합니다. 당시 좀 더 널리 퍼져있는 노논어에 제논어의 일부 문구를 추가해서 전한 말 원제(元帝) 때의 학자인 안창후 장우(張禹)가 편집한 “장후론(張侯論)”이 널리 퍼져 후대에까지 이어지게 됩니다. 고논어는 공자의 생가를 보수하다 벽 속에서 발견한 판본이었다 합니다.

문제는 노논어는 내용이 가장 짧고 20편에 불과한데 고논어는 21편, 제논어는 22편이고, 추가된 편본 말고 공통된 20편 내용도 더 길고 노논어에 나오지 않는 내용들이 많은데, 안창후 장우는 전형적인 “똑똑한 이기주의자”의 면모를 보이는 인물입니다.

한서에 기록된 바로는

  1. 승상으로서 장우는 돈이 너무 많았다. 전답을 4백경이나 샀고, 경하, 위하에서 직접 관개공사를 해서 물을 대어 아주 비옥했다. 그는 향락도 즐겼다. 생활이 사치하고, 호화별장이 있으며, 음악을 즐겼다.
  2. 사람에 따라 말을 다르게 하는 것이 습관화되었다. 사람을 만나면 사람말을 하고, 귀신을 만나면 귀신 말을 한다. 어떤 제자가 왔을 때는 장우가 그를 후원으로 데려가서 먹고 마시고 놀았다. 여자가 시중들고 배우들이 공연도 했다. 다른 제자가 왔을 때 장우가 자리에 앉아서 도를 논하고 경학을 논할 때는 제자를 후원으로 데려가지 않았다.
  3. 걸핏하면 황제에게 토지를 달라고 요구했고, 자신의 사위와 아들의 관직을 청했다.
  4. 아부를 특히 잘했다. 황제의 몸이 좋지 않으면, 장우가 길일을 잡아서 목욕재계하고 점을 챘다. 만일 좋은 괘가 나오면 황제에게 올리고, 만일 좋지 않으면, 하루종일 우울한 표정을 지었다.
  5. 승상으로서, 상서의 직무를 행했고, 또한 황제의 스승이었다. 그러나 항상 권신인 왕봉(王鳳)의 권세를 두려워하여, 항상 왕봉에게 양보했고, 그의 직책을 다 하지 않았다. 결국 왕씨의 권력은 너무 비대해져서 아무도 견제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른다.

이렇게 되는데, 다섯번째 행적이 치명적인게, 승상의 자리에 있으면서도 권신을 견제하지 않고 오히려 편승하자 왕씨의 세도를 누구도 말리지 못하게 되면서 왕봉의 조카인 왕망이 결국 전한을 멸망시키고 신나라를 세우게 됩니다. 그런 그가 경학의 대가라는 권위를 내세워 당시 존재하던 노논어에 제논어를 가미한 논어장구, 또는 장후론을 편찬했을 때 과연 정치적으로 논란이 될 수 있는 내용들, 자신을 포함한 기득권 세력에 불편할 수 있는 내용들을 내용에 포함했을까 의심이 들지 않을 수 없지요.

물론, 지금의 논어는 후한시대에 장우가 쓴 장후론에 더해 고논어의 내용이 추가된 판본이 이어지고 있습니다만 이 때만 해도 제논어가 멸실된 상황이라 과연 장우의 장후론이 정치적인 입장을 반영하여 첨삭된 부분이 있는지를 확인하는게 불가능한 상황이 아닌가 합니다.

다만, 수년 전 해혼후의 유하 무덤에서 제논어가 발견되어 해독이 시도되고 있다고 하니 언젠가는 논어에도 정치적인 첨삭이나 왜곡을 온전히 벗겨낸 원전의 형태를 추정할 수 있게 되지 않을까 하는 기대가 있습니다. 어쨋던, 이렇게 고금을 통털어 학문이나 업무적 능력이나 똑똑함만이 처세의 모든 것이라 착각하며 책임감이 부족하며 본분을 다하지 않는 일단의 고위공직자, 엘리트들(특히,,, 복지부의 그놈들)을 떠올리게 되니 새삼 똑똑한 이기주의자들의 처세가 얼마나 큰 해악을 끼치는 지를 실감하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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