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자와 협객의 차이.

군자는 환난에 처해서는 근심하지 않으나

환락을 마주해서는 근심하고 걱정한다.

권력자를 만나서는 두려워하지 않으나

불쌍한 사람을 마주해서는 마음에 놀란다.

채근담 221편


공자가 유교의 이상적인 인간상으로 제시하는 개념은 “성인(聖人)”입니다만, 성인은 너무나 이상적인 인격체이기 때문에 보통의 인간성과는 동떨어져있으며 성인은 한 나라의 왕이 되어야 할 자질 정도로 상정되고는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유교에서 보통의 사람들이 추구해야 하는 목표점은 성인이 아닌 군자라고 말합니다.

유교경전에서 군자는 이에 대비되는 소인들을 계도하는 지도층 인사로 언급하는 일이 많아 정치적인 특권계급을 암시하기도 하기에 기본적으로 사회지도층이나 관료계급을 전제하는 개념으로 취급되는 경우가 많았고, 반대로 권력을 탐하지 않고 낮은 자리에서 정의와 선함을 추구하며 실천하는 이들을 사람들은 “의협”으로 받들고는 합니다.

때문에 대중문화에서는 “군자” 보다는 “의협”이나 “협객”을 더 멋있고 바람직한 인간상으로 다루는 경우가 많죠. 남의 어려운 사정을 돕거나 억울함을 풀어주기 위해 자기를 희생하는 사람이 소인들을 계도하고 가르치며 다스리는 군자보다 환영받기에 마땅한 인간상인 건 어쩌면 당연한 걸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도(道)를 찾아 헤매며 인(仁)을 따르는 군자가 협(俠)을 따르는 협객과 근본적으로 다른 점은 정치적인 위치나 권력, 또는 신분에 있는게 아닙니다. 채근담에서 말하고 있듯 군자도 협객과 마찬가지로 권력자를 만나서 두려워하지 않으며 불쌍한 사람을 마주하여 놀라며 빨리 도움을 주고자 손을 내미는 마음에 있어서는 다른 점이 없습니다.

굳이 군자와 협객을 나누는 기준이라면, 군자가 “마음가짐”을 “행동”보다 더 우선순위로 둔다는 점에 있을것입니다. 협객이 스스로에게 닥친 환란에 대해 근심하지 않고 환락과 즐거움에 대해서 오히려 근심하고 걱정하는 마음을 가져야 한다는 이야기는 어디에도 없습니다. 왜냐하면 의협심이라는 것은 권력에 소외된 약자들이 원하고 그리워하는 인간상이지, 양심과 덕성을 가지고 이 나라와 사회에 필요한 무언가가 되고자 결심한 사람들이 좇아가고자 하는 인간상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권력에 피해를 보는 대중과 소외되는 약자들이 모두 “선한”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힘 없고 가난하며 절박한 이들 중에서도 악하고 잔인하며 천박한 소양을 가지고 있는 “소인(小人)”이 많습니다. 그러한 이들이 바라는 인간상은 인간성에 대한 믿음이나 고결학 덕성 같은 것 보다는 당장 내 눈 앞에서 벌어지고 있는 차별과 압제로 인한 참상을 해결해주는 가시적인 행동이 먼저이고 절박하지 그들 영웅들이 어떤 품성과 성정을 가지고 있을 것인지는 별다른 관심이 없는게 자연스러울테죠.

때문에 의협심을 실천하는 영웅이나 협객에 대한 이야기들을 보면 주인공들의 성품이 인자하거나 공명정대한 경우보다 괴팍하고 악인을 증오하는 정도가 도리어 광기에 차있는 경우들을 볼 수 있습니다.

그렇기에 우리는 두 가지 결론을 내릴 수 있을겁니다.

첫째는 군자라도 자기 성품과 덕을 쌓고 다른 이를 가르치는 것에만 그치고 불쌍한 이를 보고도 방관한다면 위선자일 뿐 진정 군자라 할 수 없다.

둘째는 남들이 되어주기를 바라는 것에 메몰되지 말고 내가 무엇이 되어야 하는지를 먼저 고민하며 그 변화는 눈에 보이는 것부터가 아닌 내 마음과 덕성의 변화에서부터 시작되어야 한다.

그래서 주역에 “군자는 표변한다(君子豹變)”고 주장하고 있는거겠죠. 군자가 표면한다는 것은 표범이 겨울철에 털 무늬를 완전히 새롭게 바꾸는 것처럼 잘못을 깨달았다면 근본부터 변해야 한다는 것을 말하고 있는겁니다. 내가 어떤 행동을 하고 무엇이 되어야 하는지에 대한 고민, 자신의 근본부터 변화해나가는 자아의 발전이 결여되거나 사람들이 원하고 우러르는 가시적인 행동에 우선순위가 밀리기 시작한다면 의협심의 발로에서 나오는 협행이 될 수 있을지는 몰라도, 그것이 군자의 도리와 실행이라고 하기는 어려울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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