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에 물욕이 없으면 그 마음이 바로 가을 하늘과 활짝 갠 바다고
자리 옆에 거문고와 책이 있으면 그 자리가 곧 신선이 머무는 곳이다.
채근담 후집 9편
채근담 후집 9편에 나오는 “신선이 머무는 곳”은 원문에 석실단구(石室丹邱)라는 단어로 나옵니다. 여기서 석실은 돌로 된 방으로, 상고시대 전설적인 신선으로 알려진 광성자가 기거했던 공동산 내 동굴을 의미합니다. 단구는 신선이 산다고 알려져 있는 땅, 즉 이상향을 의미합니다.
저자가 단구라고 해도 충분히 의미가 전달될 터인데, 굳이 석실을 언급한 이유는 광성자라는 상고시대의 신선이 주장했던 말이 도교의 핵심 가르침을 잘 대변하고 있기 때문일 것입니다. 옛날 황제가 천년을 넘게 젊음을 유지하며 산다는 신선(광성자)에게 지극한 도(至道)를 구하기 위해 공동산 석실을 방문했다고 합니다. 여기서 광성자는 이런 말을 합니다.
“당신이 묻고자 하는 것(至道)은 곧 만물의 본질이다. 그러나 얻고자 하는 것은 단지 사물의 본질이 아닌 찌꺼기이다. 당신이 황제가 된 이후, 구름이 모여 비를 만들기도 전에 비가 내리고, 새가 계절의 절후를 기다리지 않고 날아가고, 초목이 가을을 기다리지 않고 먼저 마르는 등 해와 달이 가면 갈수록 흐려지고 있다. 사람들은 모두 당신을 슬기롭고 기민하다고 하지만 내가 보기엔 당신의 마음이천박하고 비루하다. 내가 어떻게 능히 지극한 도(至道)를 말할 수 있겠는가”.
당시 지극한 도를 구하기 위해 광성자를 방문했다는 황제는 지혜롭고 백성을 위하는 마음이 있는 성군이었던가 봅니다. 백성이 배불리 먹고 살게 하기 위해, 농사를 성공시키기 위해 신기한 도술에 가까운 지혜와 업적을 사람들이 기리고 칭송했다고 하니 말이지요. 그러나, 광성자는 그러한 지혜와 업적을 오히려 천박하고 비루하다 비판합니다.
저자는 자연의 움직임과 우주의 변화가 사람의 물욕에 의해(비록 사사로운 욕망이 아닌 백생을 위한 욕망이었음에도) 인위적으로 개변되고 왜곡되다보니 이것이 쌓이고 쌓여 결국 해와 달마저 흐려지는 지경에 다다랐다는 광성자의 지적을 굳이 “석실”을 떠올림으로서 우리에게 환기시키고자 한 것이 아닌가 합니다.
현대사회에서 우리는 신선이라는 걸 굳이 주술이나 실존하는 신적 존재로 이해할 필요가 없습니다. 우리의 마음이 욕망과 욕심으로 차있어서 자연과 환경을 파괴하며, 우리 사회가 돌아가는 순리를 뒤트는 일을 마다하지 않는다면 그 목적이 아무리 숭고하고 선하더라도 대가가 따르게 된다는 경고를 주는 상징으로서, 진정한 자유는 내 마음에서 모든 것을 내려놓음으로서 완성된다는 교훈으로서 신선을, 광성자를 기억하면 되는게 아닐까 생각해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