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엇이 천성인가?

높은 관에 큰 띠를 두른 고관대작도

어느 날 문득 가벼운 도롱이에 작은 삿갓을 걸치고

표연히 여유롭게 지내는 사람을 보게 되면

자신의 처지를 한탄하는 마음이 들지 않을 수 없다.

큰 연회장 넓은 자리에 앉은 부호라도

어느 날 문득 성긴 발 드리우고 조촐한 책상에 앉아

느긋하고 고요하게 공부하는 사람을 만나게 되면

부러운 마음이 일어나지 않을 수 없다.

사람들은 어째서 꼬리에 횃불을 매단 소처럼 몰고

발정 난 말이 소를 유인하듯 부귀로 달려들 뿐

천성에 맞게 사는 길을 생각하지 않을까?

채근담 후집 67편


채근담에서 언급하고 있는 인간의 천성이라는 것이 무엇인지를 생각해보면 이 “천성”이라는 것이 인간의 “본능”이라는 것과 결코 비슷한 개념이 될 수 없다는 걸 금방 깨닫게 됩니다.

사람이 생존에 필요한 최소한의 자원, 가장 기본적인 존엄에 필요한 최소한의 존중과 인정이 존재한다는 건 누구라도 부정하기 어려울겁니다. 여기까지는 천성이나 본능 모두 긍정하는 영역이겠죠. 문제는 그 다음입니다.

인간의 “천성”은 인간에게 필수적인 수준의 물적 자원과 사회적 인정을 획득하면 거기에서 만족하고 더이상의 것을 취하기 위해 집착하지 않고 자유로워지는 것을 요구하는 반면, 인간의 “본능”은 더 큰 쾌락과 탐욕을 좇아갑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본능이 아닌 천성을 좇아가야 하는게 정답일까요? 그러한 질문에 무조건 책에 나오는 대로, 옛 성현이 일러주시는 대로 따라하는 사람에게 진정한 승리는 찾아오지 않는다고 생각합니다. 이 문제는 내가 스스로 답을 찾고 나아가야만 하는 화두이자 인생의 질문이 될겁니다.

“본능”과 “천성” 모두 제대로 된 답이 아닐 수도 있습니다. 무한한 쾌락과 탐욕을 추구할 것인지, 아니면 지금 상태에 만족하고 더 나아가는 것을 그만둔 채 정체된 상태로 안주할 지 어느 쪽을 선택하라고 해봐야 둘 모두 정답과는 거리가 멀 수 밖에 없지요.

중요한 건 그러한 탐욕과 쾌락의 “적정선”을 결정하는 것이 아닌 온 마음을 다해 추구해야 하는 진정한 가치와 목표를 찾아내는 데 있습니다. “성긴 발 드리우고 조촐한 책상에 앉아 느긋하고 고요하게 공부하는 사람”이라든지, “가벼운 도롱이에 작은 삿갓을 걸치고 표연히 여유롭게 지내는 사람”과 같은 것을 추구하는 사람이라면 탐욕과 쾌락의 적정선을 고심하고 거기에 집착할 이유는 없겠지요.

그렇게 내가 전심전력으로 추구할 가치가 있는 구체적인 모습을 상상하고 전력질주 한다면 그것이야말로 진정 성공한 인생에 필요한 첫걸음이 되지 않을까요?

댓글 남기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