풀과 나무는 향기를 내뿜고
물고기는 물에서 뛰고, 새는 하늘을 날며
안개와 구름은 피어나고, 바람은 맑고 달빛은 휘황하다.
모두가 나의 본성에 생기를 불어넣는 경물이다.
만약 번뇌와 피곤함에 사로잡히고, 물욕이 시야를 가려서
눈길 닿는 곳에서 한 점의 흥취도 보지 못한다면
나의 본성 또한 삭막하게 메마를 것이다.
채근담 후집 137편
내가 사물을 바라볼 때에 잘못 보지 않고 사물의 본질을 꿰뚫어보고자 하는 욕망을 가질 때가 있습니다. 그렇게 내가 사물을, 세상을, 모든 것의 본질을 깨달아 안다면 나는 지금보다 더 높은 경지의 무언가가 되어있을거라는 기대를 가지는게 이상한 건 아닐겁니다.
이전까지는 보지 못하던 어떤 측면을 마침내 볼 수 있고 깨달을 수 있다면 이는 큰 발견이자 크게 한걸음 나아가는 진보입니다. 가시광선만을 받아들이는 맨눈으로 꽃을 보다가, 적외선과 자외선 파장으로 꽃이 어떻게 보이는지를 시각화 했을때의 신기함과 충격은 분명 그 전의 나보다 더 나아진 나를 만들어주는 확장이 될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그 전까지는 전혀 깨닫지 못했던 사물들의 새로운 측면을 보고 깨달을 수 있다면 분명 이전보다 더 나아진 내가 되어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생각해볼 건 사물을 어떤 면을 보는가나 감추어졌던 어떤 부분을 들쳐내는가의 부분이 아니라, 그렇게 보지 못하던 것을 보고 깨달음으로서 “이전보다 더 나아진 나”라는 존재가 되었다는 부분입니다. 내가 더 나아지고 옳게 변하지 않는다면, 새롭게 밝혀지고 깨달아진 사물의 면모들이 우리에게는 의미가 없다는 것입니다.
아무리 사물을 깊고 다층적으로 바라볼 수 있게 되었어도, 그러한 관측과 깨달음이 나를 더 나아지지 못하게 한다면, 그건 잘못된 발견이자 깨달음 입니다. 그러한 잘못된 발견에서 책임이 있는 건 사물이나 사물의 측면이 아니라 그걸 바라보는 우리의 “관점”일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채근담 후집 137편이 서술하고 있는 문장인 “눈길 닿는 곳에서 한 점의 흥취도 보지 못한다면 나의 본성 또한 삭막하게 메마를 것이다.”라는 부분은 깊게 생각하고 고민해봐야 할 대목이라 생각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