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신주의 “공부를 왜 하는가” 비판

 

오마이스쿨에서 이것저것 강의들을 교양삼아 듣다가, 강신주 철학자의 “공부를 왜 하는가”라는 제목의 강의를 들었습니다.

평소 이름은 많이 들었지만, 강신주씨가 직접 학생들에게 하는 이야기를 장시간에 걸쳐서 진지하게 들은건 이번이 처음이었습니다. 그런데, 그가 강연 중에 강조하던 주장이나 소신에 대해서 동의하기 어려운 부분이 많더군요. 물론, 정답이라는게 존재할 수 없는 철학이라는 것에서 출발해서 다양성을 존중할 수 밖에 없는 교육에 이르는 영역에서 다루어진 내용들이라 강신주가 틀리면 제 생각이 맞고, 강신주가 맞으면 제 생각이 틀리다,,, 이런식의 이분법은 안되겠지만, 강연을 듣는 내내 제가 느끼던 불편함 내지는 납득가지 않는 부분들이 생각나 글을 써보겠습니다.

당연한 거지만, 제가 철학자인 강신주씨를 철학이나 인문학으로 이겨보겠다는 게 아니고, 이런 생각도 해봄직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어서 글을 써보는 거니 너그러이 양해를 부탁드립니다.

강연의 서두는 철학의 어원인 필로소피, 즉 필로스와 소피아를 어떻게 해석하는것인지에 대한 그만의 지론으로 시작합니다. 교과서에서는 통상 필로스, 즉 사랑하다와 소피아, 지혜를 가지고 “지혜를 사랑하는 것”이 철학의 요체라고 설명하고 있지만, 강신주씨는 이를 정반대 순서로 해석합니다. 즉 “사랑하니까 알아가게 되는 것”이라고 말입니다. 그 후에 설명을 계속 들어보면 이런 해석도 일견 일리있는 해석처럼 들립니다.

하지만, 강신주씨가 고등학생들을 모아놓고 이 땅의 청소년을 향해 “죽기 직전까지 사랑하기를 멈추지 마라”, “최고로 사랑할 대상을 찾아 모든 걸 바치라”, “교과과정도 내가 무엇을 사랑하는가를 확인하기 위한 준비작업 정도로 생각하라”고 말하기 시작하면서 뭔가 어색함을 느끼게 되더군요. 그렇게 (무언가를)사랑하라, 쉽게 포기하고 좌절하는 꿈은 진짜 꿈이 아니다라고 말하는 걸 들으면서 왠지 “목숨바쳐 노오오력해라”라고 일갈하는 찌든 목소리가 연상이 되는겁니다.

물론, 노오오력하라는 것과 평생 무언가를 죽도록 사랑하라는 것이 전혀 다른 것이라는 건 분명하지만 이 두가지 요청은 잘 생각해보면 무서우리만치 공통점이 많다는 걸 알 수 있습니다.

첫번째 공통점은 둘 모두가 개인의 열정을 한계 이상으로 끌어내기를 강요한다는 점입니다. 강신주씨는 이 강의에서 학생들에게 얼마나 사랑하는 것에 열정적이 되라고 하느냐면, 처음에 사랑스러운 것을 발견해서 모든 열정을 다 쏟아부었고, 그만큼 축적된 것이 있음에도, 나중에 더 사랑스러운 것이 나오면 축적되어 있던 것이 얼마나 대단하고 중요한 것이건 상관없이 기존의 것들을 버리고 나중에 나타난 진짜 사랑스러운 것을 선택하라고 말합니다. 그렇지만, 이정도의 열정은 이미 자기파괴적인 집착과 구별하기 어려울 수 있는겁니다.

두번째 공통점은 방향성의 상실, 즉 자칫 맹목적인 몸부림으로 추락할 위험이 있다는 점입니다. 내가 제대로 가고 있는지, 내 노력이(또는 노오오력이) 정말로 나 자신에게 필요한 것이었는지는 언제나 끊임없는 점검과 성찰이 없이는 잘 보이지 않기에 쉽게 맹목적인 몸부림으로 추락하게 될 수 있습니다. 그러한 성찰과 점검이 없는 노오오력은 결코 만족과 행복을 가져올 수 없습니다. 마찬가지로 무언가를 사랑하는 것 또한 지나친 열정으로 점검과 성찰이 주어지지 않는 맹목적인 사랑으로 치우치면 그 또한 마찬가지입니다.

세번째 공통점은 한 개인의 실패와 좌절에 무관심하게 될 수 있다는 점입니다. 니가 잘 안되는게 노오오력을 안해서 그렇다 말하는 사람이나, 니가 잘 안되는게 “니가 진짜 뭘 좋아하는지”, 또는 “니 진짜 꿈이 뭔지” 몰라서 그렇다 말하는 사람이나 놓치고 있는 부분은 실패한 그 사람이 사회의 절대 대다수를 차지하고 있다는 사실, 그리고, 그들 대다수가 모두 경쟁사회에서 나름 각고의 노력과 방황(무얼 해야 할지, 무얼 좋아하는지에 대한)을 해왔다는 사실입니다.

심지어는 자살한 대학생을 두고 “진짜로 하고 싶은게 있었고, 그걸 하고 있었으면 자살할 수도 없지”라고 잘라 말하는 대목에서는  결국 개인의 대오각성이 없으면 무지한 중생이요, 대오각성을 하면 부처라 일컫는 불교 특유의 이분법이 너무도 자비심 없는 방향으로 와전되어가고 있는건 아닌가 하는 생각까지도 들게 합니다.

이 세상 사람은 무얼 사랑할 지 찾아보려 하지 않는 사람과, 목숨을 걸고 그걸 찾는걸 포기하지 않는 구도자 두 부류로만 구분되는 게 아닙니다. 세상은 좀 더 복잡한 거지요. 아인슈타인은 처음부터 목숨을 걸고 물리학을 사랑해서 결국에는 어려운 여건을 극복하고 기어코 상대성이론이라는 업적을 낸 게 아닙니다. 아인슈타인이 태어나 성장한 시기는 원래 물리학이 폭발적으로 발전해나가던 때였고, 아인슈타인 뿐 아니라 수많은 사람들이 마이켈슨-몰리가 했던 실험에 뛰어들 수 있었던게 가능한 도전의 시대였으며, 로런츠라는 롤모델과 그가 좌절감을 느꼈을 정도로 천재적이었던 라이벌들이 있었기에 물리학을 꾸준히 물고 늘어질 수 있었던 겁니다. 물론, 부유한 가정과 뛰어난 수학실력을 갖추었을 뿐 아니라 업무강도가 낮았던 특허청에 근무했기 때문에 확보할 수 있었던 연구시간과 자금도 그의 성공에 필수적인 것이었습니다.

강연중에 최고로 사랑하는 것을 찾은 사람만이 교과서에 이름을 올릴만한 성공을 이룰 수 있다는 말이나, 설령 성공을 못하더라도 사랑하는 것을 찾아낸 사람은 결코 좌절하지도, 불행하지도 않는다는 말이 불편했던 이유가 이와 같이 한 개인의 성공과 행복을 단 하나의 결정적인 요인으로 설명하려는 우왁스러운 단순화 때문이 아니었을까 합니다.

그렇게 목숨걸고 사랑해야만 알아가는 게 있고 그걸로 행복을 찾아가는, 그런 사람도 있을수 있는거고, 전혀 그것과는 다른 삶을 살면서도 못지 않은 성공과 행복을 찾아가는 사람들도 있는거지요. 오히려, 비율로 따지면 전자가 훨씬 소수이고, 특수한 경우가 아닐까요?

강연내용에도 나오는 비유이지만, 학교 다닐때부터 별이 너무 좋아서 천문학과를 가고, 그게 너무 좋아서 교수가 된 사람이, 과연 정말로 그냥 인기있고 취업 잘되니까 천문학과를 가서 어쩌다 보니 교수를 하는 사람보다 압도적으로 더 높은 학문적 성과를 얻는다는게 사실일까요? 인간의 열정이라는 것, 정열과 에너지라는 건 무언가를 사랑하고 좋아하다 보니 저절로 생겨나는 것이 아닙니다. 제대로 된 성과가 나오지 않고 좌절하게 되면 금방 사라지기 쉬운게 열정이고 에너지라는게 현실입니다. 천문학 교수의 비유에서 전자의 교수보다 후자의 교수가 더 좋은 대학의 교수를 하고 있으면서 인맥이 좋아서 더 좋은 연구 프로젝터를 따오고, 더 나은 석학들과의 인적교류도 활발했다면, 과연 그 때에도 여전히 전자가 더 크게 성공한다고 자신있게 말할 수 있겠느냐는 겁니다.

가끔, 잘 알려지지 않은 사람이 중소기업이나 작은 연구소에서 꾸준히 연구를 해서 노벨상을 받는 성공담이 언론에 나오고는 합니다. 아마도, 강신주씨는 그런 사례들을 자신의 주장의 근거로 제시하지 않을까 합니다만, 그런 성공담이야 말로 개인의 열정과 해당 학무에 대한 사랑 보다는 한 분야에 꾸준히 수십년을 매진할수 있게 보장해주는 축적시스템의 위력을 보여주는거라고 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그렇게 강신주씨가 강조하는 “사랑을 통한 앎”이 근거없는것이라고 강변한다면 저는 그럼 뭘 말하려는거냐고 되물으실 분들이 있을텐데, 저는 그저 “앎(알아감) 그 자체에 대한 본연의 사랑과 즐거움” 그 뿐이면 그걸로 충분하지 않느냐는게 철학에 대한 생각입니다.

그냥 열심히 주어진 일을 하다가, 여가 시간에 이런저런 역사나 철학에 대한 여러가지 지식들, 선배들의 고민들에 대한 것들을 듣고 공부하면서 생각하는게 즐거우면 그걸로 된거 아닌가,,, 뭘 그렇게 거창하게 자본주의에 찌든 인간성을 고약한 것으로 치부해가면서 내가 무엇을 좋아하는지에 대해 알아가고, 또 그 사랑에 헌신하는 것이 인간의 지상과제인양 진중하고 거창하게 삶을 고민하지 않아도 얼마든지 행복하고 만족한 삶을 살 수 있는게 인간입니다. 그렇게 지금의 삶과 내가 가시적으로 추구할 수 있는 것들을 차근차근 밟아나가면서도 얼마든지 내 삶과 내 관계, 내 일에 만족하고 감사하며 살 수 있는데, 거기에 더해 인문학이라는 삶의 양념까지 뿌려진다면 그 얼마나 행복하고 기쁜 인생이 되겠느냐는 거에요.

그렇게 “앎에 대한 사랑”과 “앎에 대한 기쁨”을 조금씩 취해나가다 보면 어느덧 나 스스로 생각할 줄 아는 사람이 되고, 그렇게 스스로 생각하는 사람이야 말로 노예가 아닌 주인되는 삶을 사는게 아니냐는 겁니다. 지금은 특정 한 개인이 인맥이나 시스템의 협력 없이 혼자만의 열정과 노력으로 인류의 번영과 진보에 기여를 하는 업적을 쌓아가기가 어려워진 고도로 정보화된 사회입니다. 이런 때일수록 필요한 게 진짜 “앎” 그 자체입니다. 워낙에 사이비와 가짜가 판치고, 검증 안된 주장들이 수많은 분야에서 횡행하는 이 때에 휩쓸리지 않고 그런 거짓과 진짜를 구분하는 앎 그 자체가 절실해졌다는 거지요.

그래서 “사랑하면 알게 된다”는 요청보다는 그냥 “(무엇이든간에) 알아간다는 기쁨”이 더 중요하고, 우리에게 필요한 해석이지 않은가 하는 생각입니다. 사람이 (본질적으로나 궁극적으로)내가 무얼 원하는지 안다는게 정말 어려울 뿐 아니라, 잘못된 확신에 빠져서 허송세월을 하기 쉬운 화두입니다. 파랑새를 쫓으려고 평생을 세계를 돌아다니며 헤매다 결국 집에 돌아와보니 파랑새가 있었다는 격언이 진지하게 생각해볼 우화인 거에요.

물론, 모든 사람들에게 제 말이 다 진리로 통용될 수는 없을겁니다. “내가 사랑하는 건 무언가” 이게 정말로 중요한 필생의 화두인 사람도 있을 거에요. 다만, 제가 드리고 싶은 조언은 지금 내가 무얼 사랑하는가를 찾아다니기 이전에 일단 “내가 지금 무얼 할 수 있는가”를 생각하고, 열심히 노력하면서 삶에 만족과 감사를 느끼다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공허함에 목이 타들어가든지, 좌절과 실패로 불행해졌을 때, 내 인생이 다 끝났고 남은게 아무것도 없구나라고 느꼈을 때 강신주씨가 말하는 그런 화두에 죽자사자 메달리는 것도 그렇게 나쁜 전략은 아니지 않겠는가 하는 겁니다.

적어도, 저는 하루하루 저에게 주어진 일, 제가 맡은 책임, 아내, 가족들에 최선을 다하고 있습니다. 그걸 속박이나 메여있다고 생각하는 것도 물론, 가끔씩 있긴 하지만 그럴때마다 나 자신에 대한 성찰과 끊임없는 회의를 통해 그런 생각이 내 자신의 불완전성과 동물적 충동에 기인한 것이라는 걸 들여다보게 됩니다. 뭐, 나 자신이, 나를 포함한 사람이라는 동물이 뭐 그렇게 대단한 존재가 아니라는 걸 생각할 때마다 나 자신의 눈높이로 세상을 바라볼 게 아니라, 나 자신을 포함한 모든 시스템과 생태계, 자연과 우주의 일원으로서의 나라는 일부를 바라보고 겸손해지는게 진짜 합리이자 철학일수도 있다는 생각을 항상 하면서 살아왔기 때문에, 강신주씨의 그런 강연이 듣는 내내 거북하고 동의하기 어려웠습니다.

물론, 저같은 생각이 진짜고, 강신주씨의 강연이 쓰레기라는 게 아니고, 저나 강신주씨 뿐 아니라 저마다의 다양한 생각들이 모두 “자기 스스로 생각해서 내린 결론”으로서 존중되어 마땅하다는 것이기에, 여러분도 스스로 각자의 생각으로 다양한 결론을 내보는것도 재미있을 거라 말씀드리면서 길고 지리한 글을 마칩니다.

강신주의 “공부를 왜 하는가” 비판”에 대한 1개의 생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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