많은 사람이 의심한다고 하여 네 독창적 의견을 죽이지 말라.
자기 주장만 앞세워 남의 말을 배척하지 말라.
작은 은혜를 사사로이 베풀러 원칙을 훼손하지 말라.
공론을 이용하여 사사로운 감정을 풀지 말라.
채근담 131편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세상을 올바로 살아가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그 이유는 우리들 대부분이 자신이 도의를 아는 군자가 아니고, 지혜로 세상을 개척하는 지혜로운 자도 아닌 평범하고 속좁은 소인에 불과하기 때문입니다. 공자의 손자인 자사가 쓴 “중용(中庸)”이라는 책을 읽어도 중용이 무엇인지 와닿지 않습니다. 중용이 무엇인지 해설하고 설명하는 사람들마다 제각각 다른 이야기를 하기에 혼란스럽기만 하지만, 채근담의 이 이야기를 듣다보면 중용의 도가 무엇인지 감을 잡게 됩니다.
중용(中庸)이라는 건 어느 두 극단 사이의 평균을 뜻하는 개념이 아닙니다. 악덕이 될 수 밖에 없는 양쪽 방향의 치우침을 경계하며 삼가며 고민하다 보면 그 사이에 진정 현명한 행동방침을 찾아낼 수 있는데, 그것을 중용이라 정의할 수 있는것이죠. 많은 사람들이 내 생각을 의심한다고 쫄아서 내 의견을 굽히는 용렬함이 도가 될 수 없듯이, 거꾸로 내 주장을 앞세워 남의 말을 배척하는 행위도 도에서 멀어지며 속좁고 배타적인 소인의 길을 걷게 됩니다. 우리는 쫄지 말되 배척하지도 않는 그 사이 중용에서 진정한 도를 고민하고 실천할 수 있습니다. 둘 모두 악덕인 사이의 어중간한 가운데에서 평균을 낸 위치를 결코 중용이라 부를 수 없다는 것을 쉽게 이해할 수 있습니다.
원칙이라는 것이 중요하다는 건 세상이 다 인정할 수 있는 보편적인 명제라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러한 원칙을 내세워 사사로운 감정이나 사익을 편취할 수 있는 기회가 생겼을 때 기꺼이 그러한 기회를 즐기며 내 잇속을 챙긴다면 그것이 과연 우리가 피하고 멀리 해야 하는 악한 한 쪽 극단이 아니라 부인할 수 있을까요? 마찬가지로, 한 사람에게 사사로이 은혜를 베풀어 많은 이들이 원칙을 훼손하는 것 또한 우리가 취해야 할 길이라 할 수 있을까요?
중요한 건 기계적이고 무조건적인 원칙의 사수와 실천에 있는 것이 아니라, “사사로이 누군가를 챙기거나 원한을 갚으려 원칙을 이용하거나 무시하는 두 극단에 숨겨져 있는 나 자신의 “삿된 마음”을 경계하고 멀리하는 공정함을 지키고 실천하기 위해 고뇌하고 노력하는 모든 시도들이 진정한 중용의 도가 아닌가 합니다.
결국 공자가 중요하게 여겼던 도는 특정한 글이나 설명으로 구체화되는 어떠한 독트린이나 행동강령이 아닌 우리들 마음 속에 숨어있는 삿된 것들을 배척하였을 때 밝히 드러나게 되는 거라 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