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노하지 마라 vs 분노하라

분노는 얼핏 보기에 타인을 향한 감정처럼 보인다. 그러나 인간이 분노에 휘둘리는 순간 이미 자신을 잃어버린다. 외부를 향해 폭발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가장 먼저 무너지는 것은 분노한 자의 내면이다. 분노는 상황을 있는 그대로 보지 못하고 왜곡한다. 순간의 열기에 사로잡히 모든 것을 적으로 돌리고 사실보다 감정에 더 크게 흔들린다. 분노는 적을 무너뜨리는 것이 아니라 자기 판단과 이성을 무너뜨린다. 타인에게 상처를 입히기 전에 이미 자신이 먼저 망가지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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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소리가 높아지고 몸이 뜨거워지는 순간 힘이 느껴질 것이다. 그러나 그 힘은 마치 불꽃처럼 금세 꺼지고 남는 것은 잿빛 허무다. 분노한 상태에서 어떤 말을 뱉고 후회한 적이 없는가? 상대방에 대한 미안함이 아니라 스스로에 대한 부끄러움이 느껴지지 않았는가? 후회와 수치, 자기 자신에 대한 무력감을 느낄 것이다. 분노는 적을 찌르는 창이 아니라 자신을 향하는 칼이기 때문이다.


니체는 분노가 자기 자신을 잃어버리고 감정의 폭부로 자신의 판단과 이성을 무너뜨리는 금기이자 하지 말아야 하는 실패의 하나로 간주했습니다. 분노가 적을 찌르는 창이 아니라 자신을 향하는 칼이라는 그의 지적은 고개가 끄덕여지는 대목입니다. 니체가 “분노하지 마라”고 이야기하는 것이 참으로 정당하고 온당한 이야기라 동의하는 것도 이상한 건 아닐겁니다.

그런데, 문득 정반대로 “분노하라”고 일갈하던 사람이 있다는 것도 떠올려봄직 합니다. 프랑스의 레지스탕스 출신이자 외교관이었던 스테판 에셀이 쓴 “분노하라”는 제목의 책은 사회의 모순과 직면한 문제들에 무관심으로 등돌리지 말고, 인권을 위협받고 있는 사람이 있다면 찾아가 기꺼이 힘을 보태라고 요구합니다.

말 그대로라면 이 두 주장은 서로 양립할 수 없을것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한 쪽은 분노하라 말하고, 다른 한 쪽은 분노하지 말라고 말하고 있으니 말입니다. 하지만, 니체가 분노하지 마라고 하는 것이나, 스테판 에셀이 분노하라고 하는 것 모두 실질적인 행동으로서의 분노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서로 다른 분노의 대척점을 강조하기 위해서 “분노”라는 단어를 하나의 키워드로 내세운 것이라는 걸 이해해야 합니다.

니체는 자신의 이성이 아닌 감정, 그것도 자기파괴적이고 소모적인 감정에 자신을 내맡기며 몰락하다 결국엔 후회와 미망으로 떨어지는 것을 안타까워하는 마음에서 우리에게“분노하지 말라”고 당부한 것인 반면, 스테판 에셀은 사회의 부조리와 인권이 위협받는 현실에서 눈을 돌리지 말고, 무관심하지 말라는 뜻으로 “분노하라”고 요구하고 있는겁니다.

때문에 스테판 에셀은 분노하라 말하면서도 비폭력과 평화적 봉기를 주장했으며, 니체 또한 후회와 수치, 무력감으로 남겨지게 되는 원초적 감정에 휘둘리지 않는 차분함과 이성을 중요시했습니다. 니체와 스테판 에셀의 주장이 결이 다르지 않다는거지요.

니체나 스테판 에셀 모두 나의 선택(분노하든 분노하지 않든)의 결과가 부끄러움, 후회, 수치, 자기 자신에 대한 무력감으로 이어지지 않아야 한다는 점에 있어서는 같은 지점을 가르키고 있는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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