절망조차 삶의 증거다

감각이 없으면 고통도 없다. 죽은 사람은 절망하지 않는 것 처럼 절망은 살아 있는 자의 특권이다.

느낀다는 건 여전히 반응하고 있다는 뜻이다. 아직 뭔가를 원하고 열망이 있고 삶을 바꾸고 싶은 의지가 있어야 좌절도 한다. 바로 그 점에서 절망은 무력함의 증거가 아니라 생명의 증거다. 절망할 수 있다는 사실은 무언가에 기대했다는 것이다. 그리고 절망을 느낄 만큼 간절히 원했다는 것이다.

사람이 아무것도 바라지 않을 때는 절망하지 않는다. 좌절이라고 느끼지도 않는다. 손에서 떨어진 물컵은 그저 깨질 뿐이지만 힘을 주어 던진 물컵은 산산조각 나는 것과 똑같다. 힘이 크게 작용할수록 잔해는 산산조각 나기 마련이다. 깊은 절망은 깊은 의지의 다른 얼굴이다. 삶이 고통으로 가득 차고 무의미하다고 느껴져도 내가 그 속에서 무의 미함에 분노하는 마음이 남아 있다면 내가 여전히 삶을 살아가려는 힘이 남아 있다는 뜻이다.

삶을 사랑한다고 말하는 사람들조차 사실은 그 삶이 줄 수 있는 보상과 안락을 사랑한다. 절망 속에서는 삶의 겉옷이 모두 벗겨지고 그 속에서 자기의 진짜 욕망과 마주친다. 나는 진정으로 삶에서 무엇을 원하는가. 지금 내가 힘든 이유는 무엇 때문인가. 그 질문들이 없다면 우리는 자신의 내면을 정확히 알 수 없을 것이다. 절망은 나를 파괴하는 것이 아니라 나를 멈춰 세운다. 그리고 그 시간에는 이제 어떻게 살 것인가에 대한 답을 찾아야만 한다.

인간은 절망을 피하고 느끼지 않으려고 애쓴다. 절망은 파괴가 아니라 다시 시작하는 출발점이라는 사실을 깨닫지 않으면 인식이 변하지 않는다. 내 인식이 변하지 않으면 절망 앞에서 그저 무너질 뿐이지만 인식을 바꾼 사람은 깊은 절망을 느낀 그 순간 다시 자기 삶의 주인이 된다.

절망을 두려워하지 말라. 그것은 나약함이 아니라 아직 살아 있다는 표시다. 느끼는 한, 살아 있다. 살아 있는 한, 다시 시작 할 수 있다.


니체의 이러한 통찰과 위로의 말에도 불구하고, 절망이라는 건 나를 잡아먹는 새카맣고 참으로 무서운 감정입니다. 정말로 큰 절망의 구렁텅이에 빠져있다 보면 절망이 나를 천천히 음미하며 삼켜가는 와중에도 마취라도 걸린 듯 꼼작할 수 없게 됩니다.

그만큼 절망이라는 감정은 “절망하게 될 때야말로 어떻게 움직이겠다”는 계획을 세우고 마음 속에서 그러한 계획을 떠올리며 실천할 수 있도록 항상 훈련하며 준비해놓아야만 이성적으로 대처할 수 있습니다. 절대 이렇게 책 한 번 읽고서 “절망은 관점의 차이일 뿐”을 외치며 대범한 척 한다고 해서 대처할 수 있는 게 아니지요.

마찬가지로 “내가 무엇을 원하는가?”하는 질문에 대해서도 평소에 고민하며 스스로를 들여다보는 성찰이 필요합니다. 본문에 나온 것처럼 내가 “삶”을 사랑하는지, 아니면 그 삶에 주는 “보상과 안락”을 사랑하는지 돌아보며 스스로를 정확하게 바라보며 관조하는 훈련이 없다면 정말로 위급하고 어려운 상황이 찾아왔을 때 전혀 엉뚱하고 어리석게 행동하고 있는 나 자신을 발견하게 될 수 있습니다.

계획을 세우고 지혜를 동원하는 현생인류가 정작 위기와 갈등이 닥치고 스트레스 속에 노출되었을 때 어처구니없는 행동들을 반복하는 이유는 평소에 이러한 질문들에 제대로 된 준비를 하지 않은 채 살고 있었기 때문일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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