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복하다면 살아도 좋고 뜻대로 된다면 세상을 사랑할 수 있다며 인간은 언제나 조건을 단다. 어떤 환경, 어떤 조건이 달성 되어야 삶이 의미 있다고 믿는다. 그리고 그런 조건의 대부분 은 나에게 도움이 되는 것들이다. 삶은 절대 계획대로 흐르지 않지만 인간은 언제나 긍정적인 조건을 세운다.
우리는 끊임없이 원치 않는 일과 마주하고 피할 수 없는 운명 속에서 흔들린다. 운명이란, 주어진 삶을 교정하려는 태도를 버리고 그 자체를 그대로 받아들이는 용기다. 좋은 것만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상처, 실패, 좌절, 고통같이 부정적으로 여 겨지는 의미들도 사랑하는 것이다. 고통이 사라진 삶을 사랑하는 것은 쉽다. 온통 아름답고 행복하고 풍족한데 누가 그 삶을 사랑하지 않을까? 진정 삶을 사랑한다는 것은 결과를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과정을 사랑하는 일이다. 완성된 그림이 아니라 지워지고 다시 그려지는 선의 흔들림을 사랑하는 일이다. 나는 삶이 고통스럽다는 것을 절대 부정하지 않는다. 다만 그 고통이 삶의 일부라는 사실을 받아들이라는 것이다. 고통을 제거하면 삶이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비에 젖은 날, 실패한 날, 사랑이 식어버린 날, 그 모든 순간에 그래도 나는 이 삶을 원한다고 말할 수 있을 때 진정으로 자유로워진다.
진정한 자유는 세상을 바꾸는 힘이 아니라 세상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힘이다. 삶은 완성되지 않아도 충분히 사랑할 수 있다. 그 사랑은 행복의 대가로 얻는 것이 아니라 삶 자체를 긍정하는 의지에서 비롯된다. 아무리 고통스러워도 그 고통은 삶의 일부다. 삶을 거스르지 말라. 삶을 바꾸려 하지 말라. 그것이 고통이라 할지라도 그 고통 속에서 삶을 사랑하라. 사랑할 수 없는 순간까지 사랑하는 것이 삶이다.
인간은 자기 자신의 삶, 즉 자신의 인생마저도 조건을 달면서 그 결과만으로 평가합니다. 내 삶이 그러한 조건을 충족할 때에 비로서 내 삶을 긍정하며 자기 자신을 받아들이며 사랑하되, 스스로 제시한 그 조건들을 만족시키지 못하는 삶이라면 다른 누구도 아닌 자기 자신의 삶임에도 불구하고 받아들이지 못하며 비관하며 좌절하지요.
그런데, 니체는 왜 그러한 조건을 다는 삶을 “자유롭지 않다”고 말하는 걸까요? 그 이유는 우리가 결코 통제할 수 없는 것을 통제하려고 끊임없이 시도하는 와중에 스스로 노예로 전락할 수 있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우리는 우리 삶의 결과를 통제할 수 없으며, 우리를 둘러싼 세상을 통제하는 것도 불가능합니다. 우리가 통제할 수 있는 것들에서 최선을 다하며 거기에서 스스로 납득하고 만족하는 삶을 사는 것과, 우리가 전혀 통제할 수 없는 것들에서 결과가 우연히 좋게 나오거나 나쁘게 나오는 것들에서 일희일비하며 시시때때로 기뻐하거나 좌절하는 삶을 사는 것은 단순한 행복이나 불행의 문제가 아닙니다.
우리가 통제할 수 있는 것들에서 의미를 찾아낼 수 있을 때에 비로서 우리는 자유와 자존감을 느낄 수 있는겁니다. 내가 고통을 받고 있을 때, 그러한 고통 그 자체에 의미를 두며 이를 피하기 위해서 무엇이든 할 수 있으며, 어떤 비열함과도 타협할 수 있는 태도로 이어지는 삶을 자유롭다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이 누가 있겠습니까?